김남천(본명 김효식)은 한일합방이 조인된 이듬해인 1911년 3월, 평안남도 성천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영전은 지방 유지로서 적지 않은 농토를 가진 공무원이었고, 인자한 성품을 지닌 그의 모친과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김남천은 사회 신분과 경제 사정이 좋은 집안
제 대가리에다 대고 한방 탕 쏘는 육혈포 소리로, 저승에의 삼천 미터 출발 신호를 삼는 사람이 많다는데, 미두장에서는 아무리 약삭빠른 전재산을 톨톨 털어 바쳤어도 누구 목 한번 매고 늘어지는 법은 없으니, 그런 것을 조선 사람은 점잖아서 그런다고 자랑한다던지! 채만식, 위의 책. p.82
아내가 바라보는 남편의 고통스런 모습이 서술되어 있다.
2) 염상섭
염상섭은 일본에 유학, 1919년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투옥, 1년 여의 옥고를 치르고 귀국했다. 그가 경응대학을 선택한 것은 조도전의 이광수가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는데, 그만큼 고집스런 작가라는 일면을
김남천 등과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차분하게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여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켰고, 완결된 구성법으로 한국 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했다. 1930년대 말 「까마귀(1936)」, 「복덕방(1937)」, 「밤길(1940)」등으로 우리 소설 문학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
아내를 그리게 된다. 여옥은 짧은 편지를 남기고 명일을 떠난다. 하얼빈에 있는 이군의 편지에서 뜻밖에 여옥의 안부를 알게 되고,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에서 무서운 숙명을 감지한다. 하얼빈에 도착해 이군을 만난 명일은 이군의 소개로 삼류 카바레의 댄서가 된 여옥과 재회한다. 여옥의 아파트를 방
시대에 소년기를 보내면서 해방을 맞았고, 청춘을 전쟁 속에서 보낸 후, 폐허의 터전에 새 삶을 가꾸기 위해 나셨다.
본고에서는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장용학, 손창섭, 선우휘, 김성한, 오상원, 박인환, 조향을 중심으로 해방 공간과 전후문학의 전개과정과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소설의 독자는 노동자와 농민으로 한정된다.
3-4. 1930년대의 대중소설
대중소설에 대한 비평적 관심이 활성화 되었다.
윤백남: 대중소설과 순 문예소설은 독자, 관점 등에 있어 서로 다르지만, 완성된 작품의 가치에는 우열이 없다.
김남천: 30년대 후기 장편소설이 통속소설, 순수예술소설로 구
소설, 단편소설, 희곡, 평론, 동화, 방송극, 수필, 꽁트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작품세계를 형상화한 기법도 현실재현의 리얼리즘적 방법부타 패러디, 풍자, 아이러니 등 다양하게 원용되었다. 작품의 언어 역시 당대의 작품에서 관행적으로 쓰이는 표준어와 전라도 방언을 능숙하
소설 개관
19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 소설은 근대 소설적인 성격을 뚜렷이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3.1운동 이후의 민족의식의 자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계몽주의 시대가 끝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일과 함께 시대와 현실의 어두운 면을 포착하는 단편 소설의 확립은 작가들의 큰 관심
천리마 운동'을 앞세워 북한문학의 '주체문학'을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문학이란 오로지 '수령과 당을 위해서만이 소용된다'는 주체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50년대 초기 민족전쟁의 '대의와 정당성'의 교화적 소설에서부터 60년대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자 전형창조는 항일혁명 투사들을 중심적으로 그